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

이상화

지금은 남의 땅 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?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. 입술을 다문 하늘아, 들아,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! 네가 끌었느냐, 누가 부르더냐,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.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, 옷자락을 흔들고,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.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,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같은 머리를 감았구나,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.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.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,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.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.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, 좋은 땅에 마음껏 뒹굴어도 보고 싶다. 단 하나 남은 것도 다 빼앗기고 쓸쓸한 봄을 마지하느니 보기 싫다!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?

별이 된 시인
이상화
19011943

일제강점기 저항 시인. 빼앗긴 조국에 대한 분노와 슬픔을 뜨겁게 노래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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