흰 바람벽이 있어

백석

흰 바람벽이 있어 내 쓸쓸함이 거기 가 붙어 있다. 흰 바람벽엔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있다. 어쩐지 이 방안에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것 같다. 이 방안엔 아무도 없어 그러나 어쩐지 여러 사람이 있는 것 같다. 흰 바람벽이 있어 내 쓸쓸함이 거기 가 붙어 있다. 나는 이 흰 바람벽 대고 마음속으로 어쩌면 이렇게도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라고 말하고 그러면 이 흰 바람벽은 청청하니 하늘이 있고 싸락눈이 와서 뿌리고 또 新春이 와서 서툴게 꽃이 피어 있고 여름이 와서 나무가 우거지고 가을이 와서 낙엽이 지고 또 겨울이 와서 눈이 와서 쌓인다.

별이 된 시인
백석
19121996

고향과 유년, 음식과 풍경을 통해 사라져가는 것들을 붙잡으려 한 시인. 평안도 방언의 질감이 살아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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