흰 바람벽이 있어

백석

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끄럽고 캥캥하니 무너진 삼십 년 전 세계가 내다 보이고 어쩌다 꿩 한 마리가 날기도 하고 이 벽에 죽은 어미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리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어두운 나라에서 온 ㅡ 그 어두운 나라에서 흰 선녀 하나가 내려오기도 한다

별이 된 시인
백석
19121996

고향과 유년, 음식과 풍경을 통해 사라져가는 것들을 붙잡으려 한 시인. 평안도 방언의 질감이 살아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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